"나는 너의 그 '무감각' 밑에 살아 숨쉬는 미세한 '감정'들이 사랑스럽다. 그리고 좋은 것을 함께 하려는 그 마음이 참 예쁘다. "괜찮아요, 전 아무렇지 않아요" 라며 앤처럼 웃는 네 얼굴 뒤에 '슬쩍' 보이는 약함과, 여림이 나는 좋다. 어설퍼 보이지 않아서 좋고, 만만해 보이지 않아서 좋고, 건방져 보이지 않아서 좋다. 함께 가자. 계속."


- 2007년, 내게 참 중요한 존재였던 그가 남긴 말. 오랜만에 예전 블로그를 보니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러 사건과 많은 변화가 있었다.


- 그해의 나는 안경을 썼고 자주 연극을 보았고 날마다 글을 읽고, 또 썼으며 특별한 사람들을 만났고 한 사람을 절절히 좋아했고 그 덕에 매일 울고 웃었다. 가족과 떨어져 살았고 매일 라디오를 들었고 음식을 만들어 먹었고 주말이면 꽃을 꽂아 주변에 선물했고 월요병 없는 회사원이었다.


- 지금은 듣지 않는 음악을 듣고 지금은 쓸 수 없는 글을 쓰고 지금은 곁에 없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한 사람을 좋아하고 지금은 하지 않는 일들을 즐겨했다. 지금은 없는 것들이 있었고.


- 페북은 이제 그만, 다시 블로그로. '기록'은 역시나 기억을 지배한다.



기억조차 희미한 다짐을 2013년 12월 29일에 '제가' 썼다고 페이스북이 알려줬어요. 그 다짐 후 4년 25일이 더 지난 오늘에야 '다시 블로그로' 돌아왔네요. 공백의 시간 동안 습관처럼 되뇌었어요. '써야 하는데...' 막연한 의무감을 넘어 '왜 써야 하는데?' 스스로 묻기까지 참 많은 글쓰기 책을 읽었고, 계정을 만들었다 지웠고, 결국 또... 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2018년이 또 왔네요. 여전히 쓰고 싶었어요. 자기 검열을 거두고 그저, 무슨 말이라도요. 내가 뭐라고, 남이 이글을 어떻게 볼까(보는 사람도 거의 없을 텐데), 맞춤법이 틀리진 않았나(국어선생님도 아니면서), 이런 글 써서 뭐하나... 오만가지 걱정에 눌려 결국 의미도 없는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그러다 김민식pd의 <매일 아침 써봤니?>를 만났어요. 온라인 서점에 주문하면 하루면 올 텐데 이상하게 당장 읽고 싶더라고요. 일정이 많은 날이었는데 기어이 서점에 들러 책 2권을 사왔습니다. <매일 아침 써봤니?>와 <찌질한 인간 김경희>를요. (제발) 매일 쓰고 싶었거든요. (간절히) 솔직하고 싶었고요. 두 작가를 멘토로 삼아, '올해는 진짜 쓴다!' 또 다짐했어요. (다짐 좀 그만... 그 시간에 그냥 썼으면...)


김민식pd 책을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쉬운 거예요. 다 아는 얘기고요. 마음속으로는 나도 수 백 편 써 봤으니까. 10년 전에 열심히 블로그하며 다 겪어본 일들이니까. 그런데도 계속 읽었어요. 이상하게 계속 힘이 났거든요. 너무 쓰고 싶고요. 다 비슷비슷한 얘기 같은데, 신기하게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거예요. ‘해도 된다’는 말도 막 들리(는 것 같)고.


"제가 특별한 삶을 살아서 글을 쓰는 게 아니에요. 평범한 대화도 찬찬히 들여다보고, 꼼꼼히 기록하고,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됩니다. 나의 일상이 곧 블로그의 소재가 되지요. 일상에서 글감을 찾을 때, 중요한 건 디테일입니다. 택시 기사님에게서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내려서 바로 스마트폰에 메모를 합니다. 스마트폰은 최고의 취재 도구이자 기자수첩이에요. 맛있는 음식을 보면 바로 사진을 찍어둡니다. 멋진 풍광을 만나도 마찬가지이고요. 서울 둘레길을 걸을 땐 산속 표지판을 찍어둡니다. 관악산 구간 팻말에 표시된 정보, 일테면 ‘사당역까지 30분, 낙성대역까지 15분’ 같은 정보가 다음 날 블로그에 글을 쓸 때 중요한 자료가 되거든요.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재미난 이야기를 듣거나 영화를 보고 떠오른 감상도 짧고 간단하게 메모를 해둡니다. 새벽에 일어나 전날 했던 즐거운 추억을 다시 꺼내보고, 메모에 적힌 글이나 사진을 참고하여 디테일을 추가해나가면 하루하루의 일상으로 블로그를 채울 수 있습니다.


비범한 삶이라 기록하는 게 아니라 매일 기록하니까 비범한 삶이 되는 거라고 믿으며 오늘도 달립니다."


(174-175쪽)


이런 식이에요. 일상에서 찾은 글감 우리도 많잖아요? 스마트폰에 저장해둔 메모며, 음식 사진, 캡처 화면, 웬만한 기자수첩 능가할 걸요? 그런데 이상하게 안 써져요... 정리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데 우선순위에서 자꾸 밀리는 거예요. 이거 하고 써야지, 저거 하고 써야지, 조금 더 다듬고 올려야지...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 결국 '나만 보기로 변경'해요. 오늘도 또 개인 소장...


'이 책 뭐지?' '왜 자꾸 힘이 나지?' 생각하며 계속 읽다 한밤중에 결국 눈물까지 흘렸어요. 당황스럽게. 이런 내용을 만났거든요.


"어릴 적 왕따를 당했을 때, 자존감이 무너지는 걸 경험했어요. 아이들이 나를 놀리는 건 내가 워낙 못난 놈이라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주눅 들수록 아이들은 더 놀렸어요. 그러다 문득, ‘확 죽어버릴까?’하는 진짜 못난 생각도 했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스스로 세상과 인연을 끊어버리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상처가 될 것이고, 나를 놀리던 아이들은 반성은커녕 ‘역시 저 녀석은 참 찌질해’ 하고 비웃을 것 같았어요. 결국 나만 손해인 거예요. 다음부터는 남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가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것을 하느냐 못 하느냐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세상일이 그렇더군요. 다른 사람 마음은 내 뜻대로 안 됩니다. 그러니 내가 나를 아끼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괜찮아!”

“나쁘지 않아!”

“일단 한번 해봐!”

“좀 쪽팔리면 어때?”


이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계속 앞으로 나아갑니다. 매일 쓰는 블로그는 나 자신을 향한 팬레터예요.


“넌 이런 재미난 취미를 가진 놀라운 사람이야.”

“넌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멋들어지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야.”

“넌 주위에 좋은 사람이 많은 멋진 친구야.”


저 자신을 향한 미친 팬질, 살아가는 동안 절대 멈추지 않을 생각입니다."


(218-219쪽)


제가 수없이 물었던 '왜 써야 하는데?'의 답을 이 글을 읽고서야 알았어요. 제 자신을 응원하고 싶었더라고요. 열렬히요. 2013년 10월에 세 번째 회사를 그만 두고 4년이 넘도록 '프리랜서'로 살았어요.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전혀 '프리'하지 않더라고요. 좋아하는 일을 해보겠다고 떠났는데 이건 뭐, 생활비도 못 벌겠는 거예요. 영어 교재를 출판하던 첫 직장 퇴사 후, 외주편집자로 원고 쓰는 일을 10년째 해왔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원고료가 비슷해요. 여러 가지 일을 해도 수입이 첫 직장보다 적었어요.


'어떤 일이든 하면 되지!' 호기롭게 말했지만 아무 일이나 못 하겠더라고요.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버는 법도 모르겠고요...), 너무 못 버니 막막했어요. 그래도 버틸 수 밖에. 공부하고 싶은 게 많았거든요. 내 일을 직접 만들고 싶었고요. '돈이 안 되니 다들 안 하지만, 중요한 일'을 꼭 하고 싶었어요. 그 과정에서 여러 번의 작은 시도, 반가운 만남, 새로운 배움이 가득 쌓였죠. (좌절과 자책도 차곡차곡...) 그래서 주위 사람들과 열심히 나누고, 작은 모임들을 만들었어요. 참 즐거웠고요.


그런데 계속 뭔가 허전한 거예요. 깨달은 게 많은데 하나로 꿰기가 쉽지 않았어요. 벌써 30대 후반인데 이렇게 해서 언제 '내 일'을 만드나 문득 문득 불안했고요. (네, 지금도 불안해요.) 4년 넘게 프리랜서로 있다 보니 혼자 일하는 시간이 많았어요. 회사 생활을 할 땐 치이도록 사람을 만나는 게 버거웠는데, 주변 관계가 단순해지니 만남이 고프더라고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저도 모르게 너무 많이 말을 하기도 해요. 대화가 고파서요.


힘들어하는 친구, 후배들을 만날 때면, 아직 증명되지 않은 이 시간들이 헛되지 않다고, 지금도 너는 열심히 살고 있다고, 너의 고민들이 좋은 결실을 맺는 때가 꼭 올 거라고,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열심히 응원의 말을 건넸어요. 그런데 그게 저 자신한테 하는 말이더라고요. 하고 싶은 게 분명하고 그걸 위해 과감히 그만둘 수 있는 '자기 확신'이 부럽다고 친구들은 말했지만, 확신 아닌 '자기 최면' 같을 때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쓰고 싶었던 거예요. "스스로를 다독이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요. 내가 쓴 '글'이, 그 글을 보는 '나'를 다독이며 응원해주길 바랐던 거였어요. 그 글이 비슷한 고민을 하는 누군가에게 닿아 서로를 이어준다면, 그래서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준다면 더 좋을 테고요.


그런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매일 아침 써봤니?>를 다 읽고도 이곳에 첫 글을 쓰기까지 2주가 흘렀지만 드디어 시작은 했네요. 티스토리 블로그를 개설하려면 초대장이 필요한데,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김민식pd님께 초대장을 부탁드렸어요. 다음날 바로 초대장이 왔더라고요. 짤막한 응원의 글도 함께요. MBC가 정상화되고 드라마 제작에 복귀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책 출간 후 여러 행사와 업무가 겹친 지금도 pd님의 블로그(☞클릭)에는 거의 매일 새 글이 올라옵니다. 그 꾸준함의 힘을 믿고, 저도 계속해보겠습니다. <매일 아침 써봤니?>의 방점은 '써봤니?'가 아닌, '매일'에 있거든요.


Posted by 쓰는_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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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면 2018.01.24 18: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응원해. 항상.

  2. 새벽.별 2018.01.25 00: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쓰는사람님 글 참 좋네요.(반함) 처음엔 신이나다가 읽다보니 코 끝이 찡해졌어요. 글을 보면서 저도 힘을 받네요.(책도 읽어봐야지) 쓰는사람님의 글 자주 보고 싶어요. 그러니 저도 응원합니다. ^^

    • 쓰는_사람 2018.01.25 17: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닉네임이 참 곱네요. '새벽.별'님 :) 새벽.별님 글도 충분히 좋아요. 그러니 우리 '매일'만 더해봐요. 얼마나 계속할 수 있을지 저도 걱정되지만, 올해는 고민걱정보단 일단 하자! 그걸 우리의 목표로 가봐요.

  3. itsokay 2018.01.25 02: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쓰는 사람. 몸과 마음 구석구석에 써놓은 글들이 이미 많은 사람. "스스로 다독이며 계속 나아가기 위해" 쓰는 글이 누군가를 또 움직이네요. 나도 다시 해보려고요. 고마워요. (이상하게 댓글이 계속 오류나서 다시 달다가 글 다시 읽고 또 좋고. ㅎ)

    • 쓰는_사람 2018.01.25 17: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몸과 마음 구석구석에 써놓은 글들이 이미 많은 사람" <- 이 말 본인한테 하는 말이죠? ㅋㅋ 누구보다 많은 사람이 친구님인 거 잊지 마세요. 그거 기억하게 하려고 블로그 시작했어요. 내 곁에 있는 사람들부터 움직이게 하려고. 그 힘 받아 나도 함께 가고 싶어서. 우리 다시 해봐요. 서로 읽어주고, 응원해주고, 그 과정에서 이렇게 결과물도 만들고. 꼭 하게요. 꼭.

  4. 단단비 2018.01.25 14: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찌질한 인간도 읽어보았고, 공감이 가고 마음이 위로가 가는 책이었어요.
    매일 아침 써봤니?도 읽으면 큰 위로가 되고 꺠달음을 얻을 것 같네요. 읽어봐야징!

    • 쓰는_사람 2018.01.25 1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단단비님 쓰신 글을 여러 편 읽고 이 댓글을 달아요. 퇴사 경험부터 퇴사 후 배낭여행, 작은 모임들에 대한 얘기까지, 공통점이 많아서 조금 놀랐어요. <매일 아침 써봤니?>는 큰 위로나 깨달음은 모르겠는데, 신기하게 자꾸 힘이 나게 하는 책이었어요. 계속 쓰고 싶게 하는!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감상을 나눠주세요 :)

  5. 올치 2018.01.27 09: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신을 향한 팬질이라니 멋있습니다! ㅎㅎ 글이 차분하고 술술 잘 읽히는게 정말 재밌네요 종종 들릴게요

  6. itsokay 2018.01.28 0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움직이게 하려고" 아, 멋진 친구님이다. 글 쓰는 것보다 친구님 글 읽는 게 너무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