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77)
"대학원이라는 조직에 10년 넘게 자신의 청춘을 바쳐 온 젊은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주변이 잘못되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잘못된 사람이 나간 것, 이라고 간편하게 규정지어 버렸다. 나 역시 그랬다. 같은 처지에 놓인 이가 한 절박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보면서도 응원과 지지보다는 외면과 비난을 택했다. 나는 그들에게 공감하기보다는 조직의 논리에 공감했다. 나를 감싼 구조가 잘못되었음을 의심하지 않았고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이 잘못되었다고 믿었다. 나는 그러게 주변인들과 함께 괴물이 되어 갔다. 누군가의 면전에서 퍼붓는 욕설이나 물리적 폭력만이 무기가 아니다. 외면하는 것 역시 당사자에게 겨누는 날카로운 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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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9)
"만약 K의 지도교수가 K와 같은 대학원생들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면, 대학원생들은 광장에서 그의 옆에 서기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또 다른 최순실로 규정되었을 뿐이다. 어쩌면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많은 이들이, 사실은 자신의 공간에서는 국정 농단의 여러 주범들과 다를 바 없는 인물들일지도 모른다. K가 아는 많은 선배 연구자들이, 특히 교수들이 시국 선언문에 서명했다. 그들은 어느 한 개인의 삶과 그를 둘러싼 구조를 식민지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서 태연하게 광장으로 나갔다.

K의 지도교수가 특별히 ‘나쁜 인간’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가 잘못된 일에 분노하고 행동할 줄 아는 보통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는 먼 곳에서 벌어지는 악에는 쉽게 공감했지만 주변의 악에는 눈을 감았다. 피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가해자를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러한 공감 능력은 주변으로 시선을 옮길수록 오히려 퇴행한다. 어느 잘못된 구조 안에서 자신이 가해자의 위치에 있는 것을, 그래서 필연적으로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그것을 관습이나 합리화로 덮어버린다. 그래서 최순실을 비난하는 또 다른 최순실들이 여기저기에 존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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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섭의 글에는 우리가 아는 여러 얼굴이 등장한다. 그는 거대 담론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언제나 바로 곁을 들여다보게 한다. 담담히 성찰하는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많은 얼굴이 스친다. 피할 수 없이 내 얼굴도 스친다.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란 물음에 대한 #천주희 #정지우 #김민섭 #류은숙#전성원 #하승우 #강남순 #홍세화 의 반문 그리고 자기 성찰의 여정,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낮은산, 2018)를 읽는 밤.

'최순실을 비난하는 또 다른 최순실', 집단의 그늘 뒤에 숨은 '괴물'들이 버젓이 살아가는 곳이 어디 대학뿐인가. 곁에 선 사람을 죽이고도 여전히 해맑은 얼굴들이 스친다. 언제나 '선한 의도'였던 괴물들.

Posted by 쓰는_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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