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봄밤, 아끼고 아껴둔 <한 글자 사전>(마음산책, 2018)을 꺼내 읽는다. '책머리에'에 실린 작가의 글을 읽기도 전에, 시인의 소개 글에서 한참을 머무른다. 고작 10줄을 읽었을 뿐인데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려 가만히 손을 얹고, 숨을 길게 내쉬며, 소리 내어 읽었다.


김소연

"시인. 아무도 내게 시를 써보라고 권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시집 읽는 걸 지독하게 좋아하다가, 순도 100퍼센트 내 마음에 드는 시는 직접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했던 도서관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그곳에 다시 가고 싶을 때마다, 나는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바쁜 걸음들 속에서 혼자 정지한 듯한 시간이 좋다. 혼자가 아닌 곳에서 혼자가 되기 위하여, 어디론가 외출하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곳에서,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열망보다 내 마음에 드는 시를 꼭 쓰고 싶다는 소망을 꺼내놓는다. 소망을 자주 만나기 위해서 내겐 심심한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노력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심심하기 위해서라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심심함이 윤기 나는 고독이 되어갈 때 나는 씩씩해진다. 조금 더 심심해지고 조금 더 씩씩해지기 위하여, 오직 그렇게 되기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과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를 냈다."


김소연 시인의 시에 최고은 가수가 선율을 더해 만든 곡, '타만네가라(Taman Negara)'를 듣는다. (https://youtu.be/U9a_kAVBYtU) 시인의 차분한 낭독과 최고은의 매력적인 음색에, 듣고 또 들어도 자꾸만 귀를 기울이게 되는 곡. <한 글자 사전>을 읽으며 들으면 가만한 책 속 문장들이 시인의 음성으로 떠오른다.

좋다.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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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만네가라

                    – 김소연

지느러미 달고
바다 속을 떠돌아다니며
물고기들 손끝으로 만지다 놓아주던
여름이 있었고

아무 말 하지 않고
어떤 사람도 떠올리지 않은 채 
한쪽 끝과 한쪽 끝에 
가난한 집 한 채가 놓인 길 위를 
맨발로 걷기만 하던 
여름이 있었고

소낙비를 맞아 
뚝뚝 물이 떨어지는 곳을 입고
맑은 하늘이 다 말려줄 때까지 
강 건너는 물소를 쳐다보며 앉아 있던
여름이 있었고

젖은 나뭇잎들 끌어 모아
한 잔 찻물을 끓이기 위해 
한나절을 불 지피던 
여름이 있었다

10월도 여름이었고
11월도 여름이었고
12월도 여름이었으나

눈 뜨면 봄이었고
그날 아래 가을이었고
꿈속은 겨울이었던
여름이었다

Posted by 쓰는_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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