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역 3번 출구의 한 태국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카페 '자유의 언덕'에서 차를 마시며 긴긴 이야기를 나눈 밤. 친구들과 헤어지고 예약한 숙소로 걸어가던 길이었다. 익숙한 동네 이름이 눈에 띄었다. 익선동. '월인공방'과 도시 공간 기획 업체 '익선다다'의 논쟁으로 기억하는 이름이었다.


2005년,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서울이라는 도시에 살게 되었다. 최종 합격자 발표 후 입사까지 내게 주어진 시간은 3일. 아무런 연고도 없던 사회초년생이 그 짧은 시간에 구할 수 있는 곳은 고시원뿐이었다. 대학 시절, 친구가 추천한 학원에 다니려고 한 달간 묵었던 종각역 근처의 고시원이었다.


학원 수업이 끝나면 늘 인사동을 걸었다. 인사동 - 덕성여중 - 정독도서관을 지나 삼청동 길로, 때로는 종각역 - 광화문 교보문고 - 세종문화회관을 지나 통의동, 효자동까지 걷기도 했다. 낙원동 - 익선동 - 종묘 코스를 선택하는 날도 있었다. 좁은 골목을 따라 생활의 흔적을 느끼며 걷는 종로의 조용한 동네들을 참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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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근처'를 검색해서 예약한 숙소는 익선동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늦게 마신 커피 탓인지 오랜만의 외박 탓인지 새벽 4시가 되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또 하나의 이유는 소음이었다. 익선동 거리를 헤매는 이들의 목소리가 그 시간까지 들렸다. 대화 내용이 또렷이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 술에 취한 친구의 등을 반복적으로 세게 때리는 소리가 주변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울려 퍼졌다.

다음 날 아침, 부숭부숭한 얼굴로 익선동을 걸었다. 익선동, 낙원상가를 지나 종각역으로, 오래전 익숙하게 걷던 그 길을 천천히 둘러봤다. 한옥 느낌만 남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요란한 가게들이 동네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게로 바뀐 자리에 살던 주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방음 시설도 제대로 안 된 동네에 남은 주민들은 어떻게 잠을 잘까.


서울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내가 초중고를 다 보낸 옛 동네가 '역사문화마을'로 지정되면서 마을의 역사와 문화는 사라졌다. 주민들은 거의 떠나고 #힙한 가게들이 마구 들어섰다. 국적 없는 퓨전 요리들, 인테리어만 신경 쓴 카페들, #도시재생 이라는 키워드에 도취된 젊은 기획사들, 힙한 곳에서 #셀카 찍기에 바쁜 인스타그래머들이 새로운 역사와 문화를 쓰고 있었다.




로컬숍을 연구하는 잡지, #브로드컬리 4호 속 제주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주의 3년 이하 이주민의 가게들: 원했던 삶의 방식을 일궜는가?>(브로드컬리편집부, 2018)의 첫 인터뷰 대상은 '카페 그 곶'의 김기연, 조윤정 대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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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책 한 권을 다 읽고 가는 손님은 민폐 아닌가?
•••조윤정: 제주도에 갈 곳이 얼마나 많은데? 소중한 휴가 내서 겨우 며칠 왔을 텐데, 하루를 여기서 보내준 게 아닌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인증샷만 찍고 훌쩍 가버리는 손님이 많은 날은 오히려 아쉽다. 관광지의 한계일 수 있겠으나,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시간을 증명하는 공간으로 소비되는 것 같아 안타까운 순간들이 있다. 알려진 메뉴 몽땅 시켜 놓고, 사진만 찍고 가버린다. 한 입 먹고 버리는 거다. 그럴 땐 정말이지 속상하다. 정성 들여 준비한 메뉴인데.

Q. 인증샷은 홍보 관점에서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닌가?
•••조윤정: 올 만한 사람이 와주면 되는 거지, 억지로 알려지길 원치 않는다. 무슨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제주도 가볼 만한 카페 10곳 어쩌고 하는 게시물에 우리 공간을 포함해 놨더라. 댓글로 내려 달라 항의했다. 표면적인 이미지에 기반을 둔 관심은, 장기적으로는 방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공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아껴주는 단골들에게 피해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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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그 곶'은 유독 단골이 많은 곳이었다. 이 책의 인터뷰는 카페 오픈 3년 12개월 차, 제주도 이주 4년 8개월 차에 진행됐는데 당시만 해도 건물 재계약을 걱정하던 때였다. 결국 카페 '그 곶'은 건물주로부터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2017년 11월 15일, 금능에서의 영업을 종료했다. 카페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면서 두 사람이 "원했던 삶의 방식도 조금씩 일궈보려던 참"이었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손수 만들며 지켜온 작은 가게들을 동네 임차료만 높여놓고 쫓겨나는 가게 로 만드는 이 악순환을, 동네의 역사와 문화를 송두리째 뽑아 버리는 말도 안 되는 도시재생사업들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까. 답답한 밤이다.

Posted by 쓰는_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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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tsokay 2018.03.06 16: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게요. 도시재생과 젠트리피케이션은 정말 아슬아슬한 경계에 놓여있는 듯 해요. 주민들이 떠나고 생기가 없는 원도심에 사람이, 문화가 함께 뭔가를 만들어가는 건 바람직하지만 과하면 또 문제가 되고. 그 중심은 어떻게 잡는 걸까요. 그나저나 브로드컬리 매거진이라. 돌아가면 어떻게 짜여진 잡지인지 보고 싶어요. 보여주세요! ㅎㅎ

  2. 바움비 2018.03.06 2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이전 제가 살던 곳이
    어느순간 가게가 들어서고, 소위 말하는 힙한 공간들이 생겨나면서
    생선집도 없어지고 정육점도 없어지고...슬펐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으니, 엉엉

    • 쓰는_사람 2018.03.19 19: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이 글 쓰면서 답답했던 게 소비자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거 ㅜㅜ 좋아하는 공간이라 자주 가고 주위에 알리면 결국 건물주만 좋은 일 시키는 것 같고. 흑.